22/06/2026
간이 흘러도 러너의 인생 최고의 기쁨은 달리기!
강한 햇볕이 내리쬐었습니다. 출발 시각이 가까워졌습니다. 하늘에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습니다. 출발! 줄지어 오르막을 따라 걸어 올랐습니다. 1차 반환점을 돌아 내리막을 내달렸습니다. 그러곤 다시 시작되는 긴 오르막을 러너들의 뒤를 따라 올랐습니다.
빗방울이 내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산등성이에 올랐습니다. 산등성이를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기 시작했습니다. 달리기 기분이 완전히 고조되었습니다. 모자를 벗어 손에 움켜쥐었습니다. 비를 맞으며 한참 동안 신나게 산등성이를 내달렸습니다.
비가 그쳤습니다. 안개가 자욱이 끼었습니다. 솜사탕 같은 세상에 갇힌 듯했습니다. 흐릿하게 보이는 앞서 달리는 러너를 뒤따라 안개 속을 달렸습니다. 몽환적인 달리기 몰입감이 아주 깊이 들었습니다. 구름이 걷히기 시작했습니다. 밝은 세상으로 다시 나왔습니다.
질퍽한 내리막 진흙길을 내리달렸습니다. 도랑에 빗물이 콸콸콸 넘쳐 흘렀습니다. 첨벙첨벙 흙탕물을 가르며 도랑을 건넜습니다. 그러곤 천천히 달려서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습니다. 어느새 구름이 완전히 걷히고, 언제 비를 쏟아부었냐는 듯 강한 여름 햇볕이 내리쬐었습니다.
기억에 강하게 남는 판타스틱한 마라톤은 그날 날씨의 변주곡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2005년 8월 7일에 대관령 삼양목장에서 백이는 변화무쌍한 날씨 속에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첫 트레일 러닝 대회를 완주했습니다. ’2005 포커스마라톤 삼양대관령목장 트레일런 대회‘는 그렇게 백이한테 생생한 날로 압축되어 있습니다.
2026년 6월 21일, 시간이 21년을 훌쩍 뛰어넘었습니다. 인생은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잘 놀기도 해야 합니다. 백이가 잘 노는 것은 오직 뛰놀기입니다. 꾸준히 뛰놀며 살았습니다. 그랬더니 백이는 오늘도 여전히 달리기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대관령 삼양목장. 푸른 나뭇잎과 풀, 그리고 들꽃에 빗방울이 동글동글 맺혀 있었습니다. 쏴아악 쏴아악 계곡에 깨끗한 물이 장쾌하게 흘렀습니다. 구름에 가려진 산속은 수기를 잔뜩 머금고 있었습니다. 시원한 대관령 산바람이 불어왔습니다.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습니다. 배번을 받아 붙였습니다.
토니, 주니와 함께 맨 뒤에서 출발했습니다. 일렬로 늘어선 러너들을 따라 목장길을 걸어 올랐습니다. 연초록 초지가 펼쳐지고 그 뒤로 저 멀리 푸른 산들이 보였습니다. 깨끗하고 탁 트인 자연, 갑자기 가슴이 웅장해졌습니다. 양 떼 울타리를 지나고 젖소 울타리도 지나며 이리 구불 저리 구불 목장길을 따라서 느리게 느리게 달렸습니다. 그냥 거기를 달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낭만이요, 호사였습니다.
숲속으로 들어섰습니다. 예쁜 들꽃들이 피어 있었습니다. 산새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풀잎을 스치며 달렸습니다. 작은 계곡에 이르렀습니다. 돌다리가 잠긴 채 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첨벙첨벙 물을 가르며 건넜습니다. 질퍽질퍽, 늪지를 달렸습니다. 숲속에 빠져들어 뛰놀다 보니 어느새 CP1에 이르렀습니다. 물을 한 잔 마시고 양갱으로 당을 보충했습니다.
잘 다져진 산등성이 길을 달려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앞이 안 보였습니다. 안개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와, 그때하고 똑같네.‘
21년 전 그때가 생각났습니다. 환희의 폭우를 맞고 달리다 세상과 단절된 안개 속을 달리던 그때의 달리기 말입니다.
지금 보면 그런대로 앳된 청년 같던, 비에 쫄딱 맞은 채 달리던 백이. 그 백이는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든 참고 끝까지 해낸다‘는 완주자(Finisher)를 뜻하는 플릿러너 심벌이 새겨진 모자를 움켜쥐고 달리고 있었습니다. 인생 에너지가 다 고갈되어 끝판의 지경에 이르렀어도 포기하지 않고 끈기 있게 어둠을 뚫고, 느리면 느린 대로, 힘에 부쳐 어쩔 수 없이 걸어야 할 때면 걸어서 그렇게 완주를 향해 달렸습니다.
그랬더니 오늘, 그때 손에 쥐고 달리던 그 모자를 쓰고 토니, 주니 두 아들과 그때 거기를 솜사탕처럼 포근한 안개 세상에서 몽환적인, 판타스틱한 달리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CP2를 찍고 마주 달려오는 주자들께 연신 ”파이팅!“을 외치며 안개 속 내리막을 내달렸습니다.
”폼 멋집니다!“ 한 마주 달려오는 주자가 힘을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화답을 하고 신나게 질주해서 CP2에 이르렀습니다. 잠시 머무르며 콜라 한 잔과 물 한 잔 그리고 양갱으로 수분과 영양을 보충했습니다.